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덴키 그루브 (문단 편집) == 역사 == 이시노 타큐는 1985년에 '인생'이라는 밴드로 활동한 적이 있었다. 피에르 타키는 여기에 서브 멤버로 참여하면서 가사를 담당하게 되었는데, 그리고 그 결과물은 가히 충공깽이다. [youtube(cPm_O-TogCo)] 가사가 '나의 [[꼬추|꼬X]]가~'로 시작한다. 그들의 병맛 컨셉은 극초창기부터 시작된 셈이다. 이후 둘은 그룹을 나와 1989년 인디즈에 '덴키 그루브'로 데뷔, 1991년에 [[소니 뮤직 재팬]]과 계약하면서 메이저 활동을 시작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스나하라 요시노리를 그룹에 영입힌다. 초기엔 굉장히 경박한 테크노 힙합이라는 장르로 밀다가, 스나하라가 들어오면서 점점 최첨단의 이미지가 강해졌다. 그래서인지 테크노팝의 시조인 [[크라프트베르크]]의 출신지인 [[독일]]에서 인기가 많다고 한다. 1990년대에 활동하는 동안 수많은 곡들을 히트시켰고, 일본 테크노의 대표적인 뮤지션으로 성장하였다. 이 당시에 선보인 곡만 해도, '무지개(니지)', 'Shangri-La', '포켓 카우보이' 등 명곡이 많다. [[파일:attachment/전기 그루브/hirake_ponchak.jpg]] [youtube(aQFBi6qL8WA)] 1996년에 한국의 이박사와 함께 작업한 '이박사 덴키그루브: 열려라 뽕짝'의 앨범. 한국에서는 [[이박사]]를 일본에 데뷔시킨 그룹으로 유명하다. 자신들의 음악에 참여하는 것을 시작으로, 그의 한국식 테크노 뽕짝은 그를 원조 한류스타로 만들어 냈고 엘범 또한 엄청난 판매고를 기록하며 지금도 잊혀질 만하면 언급되는 레어템이라고 한다. [[파일:attachment/전기 그루브/ilbon2000.png]] 이외에도 한글로 '일본 2000'이라고 쓴 라이브 앨범도 유명하다. 스나하라 요시노리가 탈퇴한 뒤, 2000년에 'VOXXX' 앨범을 끝으로 일시적으로 해산했다가 2006년 전후로 후지 록 페스티벌 등의 라이브 등으로 재결성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더니, 2007년 재결성, '소년 영'이란 싱글을 발매하고 2008년 'J-POP' 앨범을 내며 복귀하였다. 2009년에는 덴키 그루브 20주년 기념으로 앨범 '20'을 발매하고 공연과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2019년은 결성 30주년으로, 기념앨범 '30'을 발매하고 상품 발매, 기념 라이브 등으로 거창하게 30주년을 축하하려고 했는데...피에르 타키의 코카인 적발 사건이 터져버려 오히려 덴키 그루브 최악의 해가 되고 말았다. 2020년 피에르 타키의 석방 이후 활동을 재개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